[※ 본 컨텐츠는 한국화학연구원 제2기 케미러브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 ‘천상의 맛’을 즐기는 날
세상에는 온갖 ‘데이’들이 존재합니다. 2월 14일은 여자가 연인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밸런타인데이’이고, 3월 14일은 반대로 남자가 연인에게 사탕을 선물하는 ‘화이트데이’라고들 하죠. 4월 14일은 초콜릿이나 사탕을 받지 못한 슬프고도 찬란한 솔로들을 위한, 자장면과 같은 검은 음식을 먹는 ‘블랙데이’, 11월 11일은 지인들에게 숫자 1을 닮은 막대 과자를 선물하는 ‘빼빼로 데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볼게요. 2월 19일은 무슨 ‘데이’일까요?
아마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응? 그날도 뭔가가 있다고? 징하게 많다 정말!’이라는 반응을 보이실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한국에선 이 ‘데이’가 빼빼로데이나 밸런타인데이처럼 유명세가 있는 건 아닙니다. 이 ‘데이’가 처음 만들어진 미국에서도 그닥 유명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이 날을 굳이 기념하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정답은 ‘National Chocolate Mint Day’. 한국어로 의역하자면 ‘민초데이’ 정도가 될텐데, 구글에 검색했을 때 나오는 설명에 따르면 말 그대로 민트초코 맛의 디저트를 즐기는 날이라고 합니다. 상술의 냄새가 솔솔 나기는 하지만 어쨌든 천상의 맛을 가진 디저트를 즐기는 날이라니, 듣기만 해도 바람직하지 않나요??
▶ 민초단 vs 반민초단
‘민트초코’는 꽤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 디저트입니다. 1945년 세계적인 아이스크림 체인인 ‘배스킨라빈스 31’가 창립될 때부터 존재하여 지금까지도 상징적인 메뉴로 자리잡고 있으니, 적어도 75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1973년에는 ‘마릴린 리케츠(Marilyn Ricketts)’라는 대학생이 만든 민트초코 디저트인 ‘민트 로열(Mint Royal)’이 영국의 앤 공주의 결혼식에 쓰일 디저트 공모전에서 1등을 거머쥘 정도로 품격을 인정받은 고급(?) 디저트이기도 합니다.
눈에 띄게 선명한 청록색만큼이나 개성 있는 맛과 향을 보유한 이 디저트는, 파인애플이 토핑으로 올라가는 ‘하와이안 피자’와 더불어 호불호가 가장 강하게 나뉘는 음식 중 하나입니다. 여러 맛의 아이스크림을 한 통에 담아넣는 제품을 먹을 때, 타인의 허락 없이 민트초코 맛을 추가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의 문제는 인터넷 상에서 ‘탕수육 소스를 허락 없이 부어버려도 되는가’만큼 치열한 논쟁거리로 자리잡았습니다.
한술 더 떠서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들은 민트초코를 좋아하는지 여부에 따라 자신을 ‘민초단’ 혹은 ‘반민초단’으로 규정하기도 하는데요. 이처럼 민트초코로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분하고 반대 부류의 사람들을 놀리는 것은 이미 인터넷 상에서 ‘밈’으로 굳어진 지 오래입니다.
▶ 청량함의 비밀
민트초코를 싫어하는 ‘반민초’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민트초코에서 ‘치약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흡사 양치질을 한 것처럼, 민트초코를 먹을 때 입안이 화해지는 느낌이 별로라는 것이죠. 반대로 민트초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상쾌한 느낌과 초콜릿의 달달함의 조화가 민트초코의 매력이라고 주장합니다.
민트초코는 우리가 흔히 ‘박하’라고도 부르는 민트의 추출물과 초콜릿을 적절한 배율로 혼합하여 제조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민트의 추출물’에 특유의 청량감을 담당하는 ‘멘톨(Menthol)’이 포함되어있습니다.
멘톨은 굉장히 독특한 물질이에요. 지난 포스팅에서 매운맛과 연관된 캡사이신에 대해 다루었던 것, 기억나시나요? 멘톨은 캡사이신과는 정반대로, 우리 몸이 차갑지 않은 온도에서도 ‘차가움’을 느끼도록 유도합니다. 아니, 차갑다는 느낌을 유도한다니. 멘톨이 얼음도 아니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우선 우리 몸이 차가움을 어떻게 감지하는지에 대해서부터 살펴봅시다. 우리 몸에는 이온의 출입을 조절해 전기적인 신호를 만드는 ‘단백질 채널’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각각의 단백질 채널은 특정한 자극에 반응하여 개폐되는데요. 온도의 변화 역시도 채널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자극의 일종입니다.
2002년에 규명된 TRPM8 채널 역시 온도 변화에 반응하는 채널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 채널은 약 26℃ 가량의 온도에서 활성화되면서 전기 신호를 만들어, ‘넓은 범위의 저온’을 감지하도록 유도합니다. 캡사이신이 달라붙을 수 있는 TRPV1 채널, 그리고 멘톨이 달라붙을 수 있는 TRPM8 채널과 같이 온도를 감각할 수 있는 수용체를 우리는 ‘온도 수용체’라고 부르는데요. TRPM8에서 발생하는 전기 신호는 ’차갑다‘는 감각과 ‘살을 에는 것 같다’고 하는, 추위로 인한 통증을 느끼게 하는 신호가 된다고 해요.
그런데 멘톨은 이 TRPM8 채널에 직접 달라붙을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멘톨이 우리 몸에 들어와 이 채널에 달라붙으면, 채널이 보다 높은 온도에서도 활성화가 됩니다. 즉, 실제로는 채널이 활성화될 온도가 아님에도, ‘문턱 온도’를 높이는 효과를 내어 평소엔 차갑다고 느끼지 못하는 온도에서도 차가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한 마디로 ‘민트’ 제품을 먹었을 때 느끼는 청량감은 향에 의한 착각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몸이 미지근한 온도마저도 시원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멘톨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영상 주소를 하나 첨부합니다. 순수 박하 추출 기름으로만 이루어진 '아이누의 눈물'이라는 입욕제인데요, 국내외에서는 '얼어 버리는 공포의 입욕제'로 더 유명한 물건이에요! 직접 사용해본 사람들의 후기에 따르면 40 ℃가 넘는 뜨거운 물에 이 입욕제를 몇 방울 떨어뜨리고 들어가면 냉탕에서 수영을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하네요! '차가움'을 느끼게 해주는 멘톨의 효능을 제대로 체험해 볼 수 있는 제품입니다.
▶ 시원함이 필요하다면 어디든
때문에 멘톨은 비단 음식에 첨가되는 향신료로만 활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청량한 느낌을 주는 것이 필요한 제품이라면 멘톨이 함유되어있는 것을 종종 확인할 수 있는데요.
대표적인 제품이 바로 치약입니다. 양치를 한 후에 입 안이 개운한 느낌을 받게 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치약에는 멘톨이 소량이라도 향료로 첨가됩니다. 때문에 ‘민트초코’의 맛이 치약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것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치약이 민트 맛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만요.
담배에도 멘톨이 종종 첨가된다. 담배 특유의 텁텁함과 쓴맛을 가리기 위하여 담배에는 여러 향료들이 추가되고는 하는데요. 이때 상쾌한 느낌을 주기 위해 종종 집어넣는 물질이 바로 멘톨입니다. 향료를 첨가한 담배를 지칭하는 ‘가향담배’가 한국에서 ‘멘솔(Menthol)담배’라는 별칭으로도 종종 불리는 것에서 이러한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 민트초코와 쿨파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혹시 ‘멘소래담’이라는 제품명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염좌가 생기거나 타박상을 입은 부위에 바르는 로션 형태의 진통제인데요. 이 제품의 주요한 성분 중 하나가 바로 ‘멘톨’입니다. 오죽하면 제품 이름(Mentholatum)에도 ‘멘톨(menthol)’이 들어가 있을까요!
아니, 그런데 먹는 것도 아닌 바르는 로션형 진통제에 도대체 왜 멘톨이 들어가는 걸까요? 사실, 멘소래담이 대표적인 제품일 뿐 편의점이나 약국에서 팔고 있는 수많은 ‘쿨파스’의 성분표를 보면 멘톨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멘톨이 진통 효과를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인데요, 그 원리도 사뭇 재밌습니다.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멘톨은 TRPM8 수용체에 결합하여 이 수용체를 활성화시키는 물질입니다. 그리고 이 수용체는 단순히 차갑다는 감각 외에도 차가움이 원인이 되는, ‘살을 에는 듯한 통증’에도 관여하죠. 쿨파스를 뿌리거나 붙여서 일정량 이상의 멘톨이 수용체에 붙게 되면, 우리 몸은 차갑다를 넘어서 ‘아프다’라는 감각을 느끼게 되는데요, 이렇게 유도된 ‘아프다’라는 감각이 관절염, 염좌, 타박상 등으로 인해 발생한 ‘아프다’라는 감각을 둔화시킴으로써 진통 효과를 유발합니다. 마치 ‘이열치열’ 혹은 ‘이한치한’과 같은 느낌인 것이죠.
▶ 노벨상과 멘톨
이렇게 다양한 방면에 활용되는 멘톨은 크게 두 가지 경로로 공급됩니다. 천연 멘톨의 경우 멘톨 민트(Mentha Arvensis)와 박하정유를 통해 추출되는데, 이들 원료는 인도가 대부분의 공급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편, 멘톨의 인공적인 합성 분야의 선두주자는 일본의 다카사고 향료공업(Takasago International Corporation)으로, 매년 3,000톤 가량의 멘톨을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런데 이 회사는 어떻게 멘톨 생산의 대표주자로 앞서나갈 수 있었을까요?
유기화학을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노요리 비대칭 수소화 반응(Noyori asymmetric hydrogenation)’이라는 유명한 반응을 한 번씩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이름을 보면 짐작했겠지만, 이 반응을 발명한 사람은 일본의 유기화학자였던 노요리 료지인데요. 그는 촉매를 활용해 케톤을 입체선택적으로 알코올로 환원시키는 이 반응의 효율성을 비약적으로 늘려주는 ‘BINAP’이라는 촉매를 발명하여, 그 공로로 200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갑자기 이분 이야기는 왜 하냐고요? 다카사고 향료공업 홈페이지의 기업 연혁을 훑어보면, 1983년 이 기업이 처음으로 비대칭 수소화 반응을 활용하여 멘톨을 공업적으로 양산하는 방식을 개발하였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이 반응의 선구자 중 한 명인 노요리 료지 교수는 이 기업의 이사로 재직하였고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 기업이 멘톨을 양산하는 기술을 갖게 된 데에는 그가 미친 영향이 적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죠.
멘톨과 노벨상 사이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불과 몇 주 전 스웨덴 한림원은 2021년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였는데요. 미국의 데이비드 줄리어스(David Julius) 교수와 아덤 파타포티안(Ardem Patapoutian) 교수가 생리의학상 수상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의 수상 공로가 바로 ‘온도와 촉각 감각 수용체를 발견한 공로’인데요. 캡사이신을 이용하여 TRPV1 수용체를, 그리고 멘톨을 이용하여 TRPM8 수용체를 발견하고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온도 감지에 관여하는지를 밝히는 쾌거를 이루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물질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하루 한순간도 물질과 떨어져 사는 것이란 불가능하죠. 따라서 그 물질에 대해 다루는 화학은, 일상생활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학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민트향’ 물질과 노벨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멀게만 생각하는 과학자들의 연구가 일상생활과 크게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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