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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 #7] Darkness

세상물정 - 소소한 물질 이야기

by 오가네손 2021. 12. 1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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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컨텐츠는 한국화학연구원 제2기 케미러브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 문득 드는 생각인데 저 신발이 더 비쌀까요, 아님 이 신발을 칠하기 위해 바른 반타블랙 도료 값이 더 비쌀까요? 

 

 

▶ 세계적 거장의 돌발 행동?

 

 

    2012년 런던올림픽 당시를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런던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던 붉은 철골 구조물을 떠올리실 수 있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르셀로미탈 오빗(ArcelorMittal Orbit)' 이라는 이름의 이 구조물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슬라이드(미끄럼틀)'라는 독특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요. '빅 벤(Big Ben)'에 이어 런던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작품이었죠. 물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것 같지만요...

    아무튼 이 작품을 고안한 사람은 현대 조형예술계의 거장이자, 시각미술에 관한 공로로 대영제국 기사 작위까지 수여 받은 영국의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 경(Sir Anish Kapoor)'입니다. 그의 작품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요. 우선 아주 강렬하고 밝은 원색의 색채로 작품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 이라는 금속 소재를 입체 작품에 주로 활용한다는 것이죠. (스테인리스 스틸이 어떤 물질인지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른 컨텐츠에서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하여 만든 그의 조형물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시카고 밀레니엄 공원(Millenium Park Chicago)'에 있는 <구름문(Cloud Gate)>일 것입니다. 밀레니엄 공원 자체도 다양한 조형물들이 전시되어있는 시카고의 랜드마크이지만, 이 <구름문(Cloud Gate)>이라는 작품이 밀레니엄 공원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랜드마크이거든요.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강낭콩 모양의 작품에 비친 맑은 하늘을 보기 위하여 이 곳을 방문하곤 했는데요  

 

 

    2016년 10월, "관중들은 무(無)의 공허가 주는 압도감에 뒤덮일 것이다" 라는 아니쉬 카푸어 경의 한 마디와 함께 밀레니엄 공원의 터줏대감이었던 <구름문(Cloud Gate)>는 돌연 칠흑 같은 어둠에 뒤덮여버리고 맙니다. '무(無)의 공허'라는 그의 표현이 이보다 더 정확할 수 없을 정도로, <구름문(Cloud Gate)>이 있던 자리는 마치 구멍이 뚫린 듯 비어있는 모습이 되었죠. 

 

▶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

 

    그가 <구름문(Cloud Gate)>를 칠하는 데에 사용한 도료는,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이라는 이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반타블랙(VANTABLACK)' 입니다. 2014년 영국의 '서레이 나노시스템스(Surrey Nanosystems)' 사가 인공위성 내부의 흑체 교정(Blackbody Calibration)[각주:1] 에 사용하기 위해 처음 개발한 이래로, 다양한 우주 산업 및 프로젝트에 활용되고 있는 도료이죠.

 

 

 

    반타블랙(VANTABLACK)의 '반타(VANTA)'는 Vertically Arranged NanoTubes Array 의 줄임말입니다. 이 도료를 물체의 표면에 칠하면, 탄소 원자들이 흡사 죽부인의 형태처럼 연결되어있는 나노 물질인 '탄소나노튜브(Carbon Nanotubes)'가 물체 표면에 규칙적으로 자라나면서 아주 빽빽한 '나노튜브 숲'을 형성하는데요. 만약 빛이 반타블랙으로 덮여있는 물체의 표면으로 입사되면 빽빽한 나노튜브 숲에 갇혀버리게 되고, 그 숲을 이루는 탄소나노튜브 기둥들 사이에서 핀볼 게임의 구슬처럼 이리저리 튕겨다니게 됩니다. 이렇게 수없이 반사되는 빛은 반사 과정에서 열의 형태로 에너지를 잃어버리다가, 에너지를 거의 잃어버리면 결국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그 속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즉, 빛이 들어갈 수는 있어도 빠져 나오기는 매우 어려운 형태라는 것이죠.

 

 

    과학 시간에 빛과 색에 대해서 배운 것을 떠올려 볼까요? '검정색'은 어떻게 나오는 것이라고 배우셨나요? 우리가 '검정'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사실 어떤 빛을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떠한 파장의 빛도 그 표면에서 반사되지 않고 흡수되어버려서 검게 보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즉, 어떤 물질이 얼마나 '검은지'는, 그 물질이 얼마나 많은 빛을 흡수하지 않고 밖으로 다시 내보내냐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것이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천체로 알려져 있는 '블랙홀(Black Hole)'이 '검은(Black)'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앞서 설명해드린 원리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반타블랙이 칠해진 물질은 반타블랙 특유의 구조 때문에 그 표면으로 들어온 빛을 내보내지 않고 흡수해버립니다. 개발사인 서레이 나노시스템스 사에 따르면 반타블랙 도료의 가시광선[각주:2] 흡수율은 약 99.965%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100 만큼의 빛이 들어가면 0.035 만큼의 빛만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것이죠. 이는 당시 세상에 존재하던 물질들 중에서 가장 높은 가시광선 흡수율이었기에, 이 물질에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이라는 이명이 붙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반타블랙의 특성을 두고 누군가는 '블랙홀의 색'을 띤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실제로 이 물질이 도포된 물체는 칠흑 같이 어둡게 보이는 것은 물론, 본래 가지고 있던 입체적인 굴곡이나 깊이감 마저도 인식이 불가능해질 정도라고 합니다. 당장 위의 <구름문(Cloud Gate)> 사진만 보더라도, 스테인리스 스틸 표면을 가졌을 때는 3차원의 강낭콩처럼 보이는 것이 반타블랙이 칠해진 이후로는 그냥 강낭콩 모양의 그림자처럼 보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죠.

 

▶ #SharetheBlack : 검정 전쟁

 

 

    이처럼 독특한 성질을 가진 반타블랙이라는 도료를 예술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 뿐입니다. 바로 앞서 소개해드린 아니쉬 카푸어 경 인데요. 2016년 아니쉬 카푸어 경은 반타블랙의 제조사인 서레이 나노시스템즈 사로부터 반타블랙을 예술적인 용도로 독점 사용할 권한을 구입하였고 이때부터 다른 예술가들은 99.965%의 흡수율을 기록한 버전의 반타블랙을 자신의 작품에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실제로 2018년 평창 올림픽 당시 공개되었던 세계적인 건축가 '아시프 칸(Asif Khan)'이 디자인한, 우주를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진 건축물인 '현대자동차 파빌리온(Hyundai Pavilion)'에는 아니쉬 카푸어 경이 독점한 도료보다 흡수율이 떨어지는 버전의 반타블랙으로 외관을 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니쉬 카푸어 경의 행보는 '세상에서 가장 검은 검정'을 향한 논란과 예술가들의 피 튀기는 전쟁의 서막을 엽니다.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이라는 수식어는 곧, 이 물질만이 낼 수 있는 유일한 색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는 달리 말하면, 이 물질의 독점적 사용권을 가진 사람은 이 유일한 색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특허'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기술을 개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실시권[각주:3]을 제한하는 제도이죠. 그런데 어떤 물질이 아닌 '색'을 소수의 몇 사람이 독점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그리고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일일까요?

    적어도 몇몇 예술가들은 색을 독점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아니쉬 카푸어 경의 행보에 크게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영국의 예술가 '크리스티안 퍼(Christain Furr)'는 아래와 같은 발언으로 반타블랙의 독점적 사용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였습니다.

 

"예술계에 있어 순수한 검은색이란 다이너마이트에 비견되는 힘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예술가는 반타블랙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권리는 개인에게 귀속될 수 없다."

 

    또한 크리스티안 퍼 외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SNS에 #ShareTheBlack(검정을 공유하라) 라는 해시태그를 달면서, 반타블랙의 독점적 사용에 대한 항의의 의사를 전달하기도 하였죠.

 

 

    그 중에서도 아니쉬 카푸어 경의 반타블랙 독점에 반발하여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움직인 예술가가 있었으니, 바로 영국의 현대 예술가 '스튜어트 셈플(Stuart Semple)' 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검은 검정' 도료에 대항하기 위해 공학자들과 손을 잡고, 매우 강렬한 원색을 띠는 '세상에서 가장 ○○한 ○○ (The World's ○○est ○○)' 안료 시리즈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타블랙보다 색 흡수율은 떨어지지만 값이 훨씬 싼 검정색 도료인 'Black' 시리즈를 개발하였습니다. 이 'Black' 시리즈의 경우 '세상에서 가장 검은 아크릴 안료(The World's Blackest Black Acrylic Paint)' 라는 홍보 문구와 함께 판매가 되고 있는데, 이 안료가 보여주는 검정색에 대한 실제 사용자들의 평은 호불호가 갈리는 편입니다.

 

 

    흥미롭게도 스튜어트 셈플과 그의 친구들은 이 안료들이 아니쉬 카푸어 경의 독점에 저항하기 위해 개발한 염료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이 안료를 '지구 상에서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판매하고 있는데요. 그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시겠죠?

    그리고 스튜어트 셈플에게 '저격'을 당한 그 한 사람은, 어떠한 경로로 입수하였는지 의문이지만 스튜어트 셈플 팀이 제작한 '세상에서 가장 분홍색인 분홍(The World's Pinkest Pink)' 안료를 자신의 중지 손가락에 찍은 후 이를 자랑스럽게 펼쳐보인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게재하였습니다. 마치 '이딴 건 엿이나 먹어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대영제국의 기사 작위까지 받으신 분께서 하신 행동이라기엔 약간 품위가 손상되는 행동인 것 같기는 한데, 어찌 보면 대영제국의 기사이자 예술계의 거장도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 예술과 손 잡은 화학

 

 

    우리는 흔히 예술과 과학이 서로 접점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찬찬히 되짚어보면, 예술은 화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화학자들의 연구는 예술가들이 보다 폭넓은 표현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단적으로 앞서 언급한 <구름문(Cloud Gate)>은 스테인리스 스틸이라는 새로운 소재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었던 작품이겠지요.

    제가 오늘 소개해드린, '물질'의 독점을 통해 '색'을 독점하고자 했던 예술가와 새로운 '물질'의 개발과 공유를 통해 '색'의 독점을 막고자 했던 예술가와 공학자 집단 간의 갈등. 반타블랙과 셈플의 염료에 대한 이 에피소드 역시도 서로 동떨어진 것만 같은 두 학문 분과인 예술과 화학 사이에 실은 끈끈한 연결고리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1. 적외선을 이용하여 온도를 측정하는 시스템에서, 모든 파장의 빛을 흡수할 수 있는 흑체를 활용하여 오차를 보정해주는 과정 [본문으로]
  2. 인간의 눈으로 감지 가능한 파장대의 빛 [본문으로]
  3. 기술을 실제로 구현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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